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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의 K-Sapience (28)]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⑤1920년대 조선을 뒤흔든 논쟁

민병두 입력 : 2024.09.09 15:10 ㅣ 수정 : 2024.09.09 15:10

1920년대 신문 잡지를 통해 본 논쟁= 자유결혼이냐 강제결혼이냐 그리고 자유이혼
1920년대는 좌절의 시기.. 패배주의의 틈을 타 연애병, 연애열이 빠르게 퍼져나가
정차숙, 김정옥 사건=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자유결혼을 선택...부친들은 죽기를 결심
선망과 비난의 대상이었던 신여성이 '자유연애'와 '제2부인'이라는 사회적 쟁점을 제기
신분사회의 관습인 조혼제도 비판론과 자유이혼 옹호론이 뜨거운 논쟁의 도마위에 올라
조혼 관습은 따가운 여론과 일자리 증가로 감소...생계를 보조하는 딸의 손익계산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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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남녀 평등인가?'(매일신보 1934.5.28). '요새 여자들이 말끝마다 핏대를 올리면서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징검다리를 건널때는 남편에게 안겨간다'는 내용의 신문 만평[사진=연합뉴스자료사진, 휴머니스트 제공]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1920년대는 좌절의 시기이다. 만세운동이 좌절된 탓에 많은 이들이 방향을 잃었다. 해외독립운동 사회주의계급운동 브나로드운동에 뛰어드는 이들도 있었지만 패배주의의 틈을 타고 연애병, 연애열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1980년대는 저항과 연대의 시대였다. 민주화 운동이 승리하자 1990년대는 급격히 문화의 시대로 전환한다. 1910년대 저항과 연대의 실패가 1920년대의 좌절감으로 향한 것과 비교된다.

 

이광수는 “독립운동이 지나가고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식어서 나라나 백성을 위하여 인생을 바친다는 생각이 적어지고 저마다 저 한 몸 편안히 살아갈 도리만 하게 된” 시기라고 묘사했다. 이광수가 친일을 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일 수 있지만 시대의 일단을 드러낸 표현으로 보인다.

 

 ”정치가도 될 가망이 없고 실업가도 될 가망이 없고 이것저것이 다 가망이 없구나. 에라 모두 다 낙망이다. 청풍명월에 시나 읊조리고 화조월석에 소설권이나 보면서 되는대로 죽자꾸나. 이런 생각이 조선 남녀의 가슴에 다 각각 숨어 있는데야 어찌하랴“(박달성. ‘남녀 학생의 연병 變病과 문질 文疾’ 신여성 1924) “그 누가 이같은 온유 향중의 취미있는 세월을 버리고 손과 발이 되며 대가리를 도끼 삼아 쓰는 정치 혁명 사회 운동 등 백사일생의 장중에 출입하리오?”(신채호. 문예계 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단재 신채호전집. 형설 출판사)

 

1920-30년대 결혼과 연애, 이혼을 당시의 신문 잡지와 소설을 통해서 살펴본 책으로는 <연애의 시대. 권보드래. 현실문화연구> <경성고민상담소.전봉관. 민음사>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김경일. 푸른역사>등이 있다. 기록에 바탕을 둔 것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저서들이다. 

 

<연애의 시대>에서는 앞서 인용한 비관적인 시대에 사람들의 탈출구가 된 것으로 연애를 들었다. 1910년대 초기에는 기생들에 의해 과감하게 표현되던 연애가 1920년대에 학생 계층, 독서대중에 의해 유포되었다. 1920년 우리나라의 도시화율은 5.47%로 경성인구가 20만명을 넘은 정도의 시대였다. 대부분이 농촌에서 살았다. 1930년 신문판매부수는 10만부였는데 문맹률은  77.73%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신성한 물건’처럼 여겨졌던 연애가 외국소설의 번역과 번안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신문 잡지를 통해서 유통되었다. 그 바탕에는 교육열로 급격하게 늘어난 독서인구가 힘이 되었고, 연애편지 등을 통해서 대중화되었다. 

 

1923년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수가 처음으로 서당에 다니는 학생 수를 추월했다. 1920년에는 약 6,000명이던 보통학교 입학생이 1920년대 말에는 2만명에 달했다. 1920년대 신식교육의 중등(고등보통학교 남자 5년, 여자 4년. 지금의 중고등학교를 합한 학제) 정도를 마친 여성은  1930년대 초가 되면 4000∼5000명이 넘었다.

 

1924년 동아일보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의결혼, 자유결혼을 선택한 정차숙 사건,  김정옥 사건이 보도되었다. 당사자를 실명 보도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정차숙의 아버지도, 김정옥의 아버지도 양반의 수치라며 죽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김정옥 사건의 보도는 상세해서 당시의 풍속을 접하는데 도움을 줄 것 같아 상세하게 인용하기로 한다. 동양염직주식회사 김덕창 전무의 딸 김정옥(20)과 경성세관출장소 전교환(27)이 결혼하기로 되었다. 식산은행 정읍 지점에 있는 전 모의 소개로  사진을 교환하고 혼약이 성립되었다. 김정옥이 근무지인 학교를 지방인 영천으로  옮기거나 가출하는 방식으로 결혼을 거부, 주례인 목사가 신부의 의사를 확인하고는 집례를 거부했다.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잔칫날을 나흘 남겨둔 지난 12일에 신부 정옥은 양산을 사러나간다고 나간 채로 밤이 되도록 들어오지 않음으로  밤새도록  사람을 팔방에 놓아 갔음직한 곳에는 다 찾아보았으나 종적이 없었다…신부의 아버지와 오빠가 화가 나서 신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오빠 김명호는 분이 머리 끝까지 올라 빰을 치며 발로 차는 등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매우 책망하였으나, (김정옥은) 오직 울기만 하고 시원한 대답은 안하였는데… 마른 벼락을 맞은 듯이 온집안이 떠들며 죽이니 살리니 하다가 시간은 점점 되어오고 신랑집에서는 재촉이 성화같음으로 그 아버지 김덕창씨는 자기가 정한 일이라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서 어디로 종적을 감추고 지금까지도 오지 않는 모양인데 한편으로 신랑집에서는 첫잔치라 넉넉지 못한 살림에 수백원을 들여 국수를 사오느니 과일을 사오느니 남보다 지지않겠다고 힘 자라는대로 준비하고…신랑의 어머니되는 늙은이는 양반의 집에 이게 무슨 창피냐고 당장에 죽어버린다고 야단을 하였음으로 잔치에 얻어먹으러 왔든 양복장이 손님네만 면목없이 돌아가고 말았는데….“

 

예비신부가 양산을 사러간다고 하고 나갔다고 한 대목에서 당시 신여성의 풍속도를 읽을 수 있다. 서양식 트레머리(앞머리를 둥글고 풍성하게 빗은 후 뒷머리를 틀어올린 스타일), 짦은 통치마, 양산, 핸드백(책보)등이 신여성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늘상 그랬던 일인데 오빠마저 가세한 것에서 가부장제 하에서 남자형제가 가부장을 보조하는 역할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인 목사가 신부의 의사를 확인했다는 것은 사회혼 양식의 하나로 서구식 교회결혼이 도입되고 있는 징표이다. 서구혼은 이미 당사자주의(당사자의 동의로 결혼이 성립)에 기초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서양화가 나혜석이 1920년 덕수궁 옆 정동교회에서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구한말 이후 소개된 사진을 통해서 결혼약조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매의 발전사를 읽을 수 있다. 신부가 나이 20살이고 직업이 학교교사인 점으로 보아 당시의 전형적인 신여성이었다. 이때 쯤이면 신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기이다. 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결혼과 연애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양복장이 손님네만 면목없이 돌아갔다고 한데에서 사회적 신분을 알 수 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수백원을 들여 국수를 사오느니 과일을 사오느니 남보다 지지않겠다고 힘 자라는대로 준비하고”에서 보듯이 당시에도 과다한 결혼비용이 논란이 되었다. 이중에 어떤 것은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의식과 관습에 남아있다.

 

이 파혼 사건이 보도되고서 갑론을박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삼천리, 별건곤)는 조혼 연애 정사 결혼 이혼 등의 이슈를 자주 다루었다. 조혼이라는 감옥, 제2부인의 탄생, 고부갈등의 표면화, 정조윤리의 해체 등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어서, 또 대부분은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신여성과 관련된 것이어서 언론의 주요관심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4년 8월21일자에 한 평자(一評者)가 나서서 여성이 원래 사귀고 있는 남성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전제로 하여 비판을 하였다. “자유연애라는 것을 모든 남자는 모두 다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있고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의 처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를 한다면  이것은 현대인의 감정의 정도로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이야말로 금수와 같은 추행이다”라며 도덕의 범죄자라고 비판했다. 자유연애를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시선의 반영으로 보인다. 8월24일에  충고자가 나서 “그 약혼은 그이가 한 것이 아니고 그의 부모의 의사로 한 약혼이니 그에게는 시대의 도명자요, 도덕의 범죄자라고 할 수 없을 줄 생각한다”고 옹호했다. 

 

예비신랑인 전교환이 나서서 “충고는 그만 두고 자성이나 하라”며  “애인 유무는 관계치 않는다.부모를 속이고 우리를 속인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고 여론에 호소했다. 그러자 김정옥이 당사자라는 필명으로 “부모는 나의 승락도 없이 약혼하였다. 나는 결혼이 상조(尚朝)함과  계속 공부할 의사를 말하였으나 양친은 신랑될 사람이 얌전하니 두말 말아라.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토록 할 리가 있겠느냐고 할 뿐이었다. 결혼은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히 하여 쌍방의 승낙을 얻은 연후에 상약할 것이며 승락이 없고 강제인 이상 부모의 말이 당사자의 의사라 믿을 수 있을까”라고 반박하여 논란이 마무리되었다. 

 

부모의 명령에 따라 어린 나이에 결혼한 남성이 학업(혹은 유학)을 마치고 문물을 깨달아 몇년만에 집으로 돌아오면 세상을 보는 기준이 달라진다. 열 살 전후에 첫날 밤을 보낸 누나 같은 신부가  농삿일과 집안 일로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식모 같고 하인 같아 보인다.  배운 것이 없어 말이 안 통한다고 느낀다. 조강지처를 냉대하고 신여성과 살림을 차리는 경우, 이 여성을 제2부인이라고 했다는 것은 앞서 두번째 이야기에서 소개한 바 있다. 제2부인은 첩과는 다르다는 뜻으로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는 분위기가 조어에 담겨있다. 나도향의 소설 ’환희‘에서 자신이 취한 애처가 아니라며 부모에게 며느리 될 자격은 있어도 나에게 아내할 자격은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부모의 잘못이지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2부인이 사회적 문제가 되자 <신여성>은 1933년 2월호에 ’제2부인 문제 특집‘을 내놓았다. “현실을 바라볼 때 웬만한 인텔리 여성이 민적(民籍) 없는 아내, 즉 제2부인임을 발견하게 된다”며 인습의 제단에 바쳐진 그들을 기존의 도덕이나 법률로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다수는 제2부인을 동정하지 않았다. 이익상은 “제2부인이라는 칭호는 첩이라는 천박한 명칭을 미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김활란은 “부인이면 부인, 첩이면 첩, 나쁜 여자면 나쁜 여자지 억지로 당치 않은 관사를 붙여 가지고 부인이 무슨 부인이냐”며 남성 본위의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신종 첩을 둔 남성들은 문제가 되지 않고 여성들만 문제가 되는데에 있었다.

 

문제의 근원은 조혼제도에 있다.  1928년 잡지 <조선농민> 주최 ‘조혼에 관한 좌담회’에서 공개된 통계에 의하면 10세부터 16세까지 조선 내 기혼 인구는 42만4936명이었으며, 5세에서 9세까지가 980명, 그 밖에도 3세가 6명, 2세가 2명이었다. 이 좌담회에서는 “자녀를 물건처럼 취급하는 까닭에 소유욕의 발동으로 자기 자식을 속히 장가보내면 그 집은 장하다고 인식되는 못된 인습에서 비롯된 가장의 우월감이 낳은 악습”,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쾌감과 그 며느리를 부려 먹자는 마음이 낳은 폐단”이라는 비판적인 의견이 개진되었다.<경성고민상담소>

 

양윤식은 “신분 지위 재산이 있는 상류계급에서는 자손의 경사를 보기 위해, 빈천한 하류게급에서는 가계를 돕기 위해 또한 자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발로로 한때는 조혼의 폐풍이 성행하여 심한 예로는 남자는 10세 전후….”라고 ‘현대 조선의 혼입 법제’<삼천리. 1932년9월>에서 그 연원을 분석했다.

 

“옛날부터 조선의 여자는 결혼년령에 달하면 또는 하기도 전에 남의 안해라는 직업을 갓게 되었는데 그것을 소위 결혼이라고는 하나 결혼의 요소되는 연애문제는 있어 볼 여지가 없고 육욕을 채우게 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 아들낫는 생식기계가 되기 위해, 결국 남자의 생활을 편의케 하여 주기 위해서의 결혼이다. 그리하여 그 보수는 그 남자에게 봉사하는 동안 의식(衣食)의 자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이름하여 결혼직업, 인처직업(人妻職業)이라 하는 것이 상당할 것이다”(김평우, 〈조선농민〉,1927)

 

이정로는 1920년대까지 조혼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를 첫째 늙은 부모에게 하루 빨리 손자며느리를 보여드리고 싶은 그릇된 효심, 둘째 어미 된 자가 병이 있거나 허약해 가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을 때 며느리를 얻어 가사를 돌보게 할 현실적 필요성, 셋째 부유한 계층에서 일찍 며느리를 얻는 것이 유행이 되어 자식을 조혼시키지 못하면 집안의 수치로 여겨지는 그릇된 풍조 세가지를 들었다. 그는 조혼이 자녀를 빨리 늙게 하고, 자녀의 양육과 교육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며 자녀의 의사를 무시한 혼인이 이혼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이정로. ’조혼의 폐해‘ 가정잡지 1922년5월. ‘경성고민상담소’에서 재인용>

 

그렇다. 자유연애 자유결혼 못지않게 자유이혼이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이 시대에 이혼은 아주 소수만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1920년대 초반까지는 이혼을 ‘자각 없는 유행병’이라고 치부했지만 1924년에 되어서는 이혼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받아들였다.(‘주목할 이혼증가, 새도덕을 구하는 새현상’ 1924.3.26 ‘이혼 수 격증 신중히 고려할 문제’ 1928.8.14 동아일보)

 

동아일보 1925년9월18일 보도에 따르면 그해 8개월간 경성부 부내 혼인 건수는 980여건, 이혼 건수 100여건이던 것이 1929년 보도로는 결혼 대비 이혼이 거의 5%에 달한다. 조선총독부 조사월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이혼은 총8,021건으로 연령별로 살펴보면 25세에서 30세 사이에 있는 부부의 이혼은 전체 이혼 수의 12.5%인 1,001건으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최혜실/ 권희정의 ’식민지 시대 한국 가족의 변화:1920년대 이혼 소송과 이혼 사례를 중심으로‘에서 재인용) 

 

이혼 소송과 이혼 건수의 증가는 1920년대 변화하고 있던  민법과도 상관관계가 있다.일제는 1912년 ‘조선 민사령’ 을 공포하면서 가족법 부분은 “조선인의 친족 및 상속에 관해서는 조선의 관습에 의한다”고 규정하며 관습법을 적용시켰다. 하지만 1923년부터 일본민법 규정을 의용(依用)하여 부부 쌍방에 대하여 이혼청구를 허용했다. 아마도 이 시기의 이혼 증가는 그동안 누적된 문제의 폭발에 기인한 점도 있어보인다.

 

잡지 <서광>는 1921년 벽두호에서 ’목하 우리 조선인의 결혼 및 이혼 문제에 대하여‘라는 특집기사를 다루었다.(이하 권희정 재인용) 나혜석 등 13인이 논쟁에 참여했다. 장용진은 피차 합당한 이유 없이 경솔하게 이혼을 주장함은 “인도상의 죄악”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조혼의 폐해는 심하나 이미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일신을 희생으로 공하여 금후로 오는 청년자녀에게나 이상의 가정을 주도록, 화락을 주도록,행복을 주도록 노력하는 것이 도리의 정당할 것이니, 무교육의 처일지라도 임시교육이라도 보습시켜서 가급적 이상에 근한 배우(配偶)를 작하도록 노력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홍병선은 ”부모가 처를 강제로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수년을 동거해 놓고 심지어 자녀까지 있는 부인을 버리려 함은 축첩보다 악한 죄“라고 하며 반대했다. 

 

반면 자유이혼을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도 거세었다. 애정이 없으면 이혼하는 것은 마땅히 합리적인 일이고 이것 역시 가정을 개혁하는 일이라고 논지를 폈다. 황석우는 “조선의 사회개혁의 제1보는 가정의 개혁이 우선이다. 조선의 가정은 사랑과 평화가 없다. 성교의 시간이 지나면 개나 원숭이 같이 일일에도 몇 번식 다투어 으르렁거리는소리가 들릴 밖에 무엇이 있느냐”며 “사랑 없는부부의 이혼은 곧 사랑 없는 사회의 결말을 가지고 올 것이니 나는 적어도 현하 조선에 있어서는 이혼의 맹렬한 주창자가 되려한다”고 적극 옹호했다. ‘사랑 없는 결혼은 평생 강간’이라는 생각이다. 1920년 대 중반에 들면 “이혼과 결혼이란 문제는 신문잡지에서 하도 떠들어서 조금도 신기하지 않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인정에 호소하는 주장도 있다. 남자들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입으로는 아내가 마음에 안맞느니 무식하느니 하고 타매를 하며 힘을 다하여 이혼! 이혼!하나 한번 돌아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풍습의 죄! 부모 현명하지 못한 처사로 인하야 그도 또한 뜻 아니 한 구렁에 빠져서 신음하는 희생자이니 이념에 동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면 차마 이혼하자는 소리는 못할  줄로 압니다. 비록 마음에 맞지 않는 아내이라도 꾹 참고 데리고 지내면 사랑의 생애는 희생이 될지라도 전 생애에 큰 관계는 없겠으나 한번 이혼을 단행하고 보면 이혼당한 여자편에서는 거의 전생명 전생애를 그르치게 되는 참상을 이루나니 요사히 이혼은 인도상으로 보던지 풍기 상으로 보던지 단연히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좀 참지요. 때 못 만난 것이나 한탄하고 가엾은 부인들을 위하여 이혼은 하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다. 한편에서 살기 싫다하면. 또 한편에서는 응하여야만 할 터인데 소박을 해도 공방에 눈물을 흘리며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가엾은 이를 차버린 다는 것은 아무래도 인도상 부덕의한 일인가 합니다”(동아일보 1924년 이혼문제의 가부 2.)

 

그런데 당시 언론이 보도한 이혼사례를 보면 전체 비율 중 가장 높았던 사유는 남편의 범죄 연루, 알콜 또는 아편 중독아내에 대한 학대와 구타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에 여성이 취업할 수 있는 곳이 극히 제한적이라서 경제적으로 독립이 힘들었다. 친정에 돌아가서 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학대와 구타 속에서 갈지 않겠다는 여성의 인권의식의 발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권희정의 생각이다.

 

1920년대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신여성들이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조선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혼인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여전히 주체적이지 못했다. 자유가 늘어나는 만큼 부정적인 시선도 따랐다. 또 그들의 주장이 여성해방운동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혼 관습은 따가운 여론과 일자리의 증가로  조금이나마 줄어드는 추세에 접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촌에서도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공장에 취직을 해 가거나, 일본인들의 수요에 맞춰 하는 가내부업 등이 생겨나면서 실제로 딸이 가계의 생계를 보조하자 딸을 일찍 시집보내지 않으려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었다.  몇해 더 길러서 시집보내는 것이 타산에 맞았다. 

 

당시 전체 공장노동자 중 여성이 차지한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1922년 20.5%에서 1930년 33.7%, 1940년 31.7%의 수준으로 증가했으며, 1930년대 여공은 전체 공장 노동자의 약 1/3 수준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회경제적 변화는 어떤 변화를 갖고 왔을까? 1930년대, 일제 후반으로 가본다. 사회주의와 여성, 페미니즘과 여성, 신여성에서 모던걸로의 변화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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